연예인 발해 멸망전 고찰 (8) - 발해왕제와 대광현.그리고 후발해 - 下[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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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기먹는스님 댓글 0건 조회 117회 작성일 24-04-27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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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mkorea.com/6885806282



전편입니다.




저는 발해 왕제의 이후 행적을 다음과 같이 추측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아예 추측할 수 있는 사료 자체가

없기 때문에 진짜로 추측의 구간일 수 밖에 없습니다.



1. 자연스럽게 부여부와 제일 가까운 장령부로 후퇴하여 거란군과 8월까지 맞서다가 장령부가 함락되면서

전사하거나 사로잡혔을 가능성, 혹은 항복했을 가능성


2.장령부,압록부 함락 이후에 잔존 세력들과 함께 탈출하여 발해 유민 세력(발해 후계국)을 만들었을 가능성





1번을 우선 따져 보면, 저는 발해 왕제가 동원한 병력들은, 925년에 장령부와 압록부에 최후로 배치된 발해정부의 마지막 주력군 중 장령부 방향의, 약 10만 이상으로 여겨지는 발해 주력군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압록부 부분에 배치된 주력군은 이후 장령부가 거란군의 맹공을 받을 때 도우러 나섰다가 패배하였으며, 이 장령부의 발해 주력군은 장령부의 마지막 거점인 회발성이 함락될때까지 격렬하게 저항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시점까지 왕제가 죽지 않고 싸웠다면 아마 포로로 잡혔거나 끝내 항복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왕제가 포로로 잡혔어도 발해 중심세력들의 항쟁세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뒤로 8년이나 지난 934년에 '세자' 로 기록되어 있는 대광현이 무려 수만의 무리와 함께 고려로 내투해오기 때문입니다. 이 때 대광현이 수만이나 되는 세력을 데리고 올 수 있었다는 것은, 발해 주도세력이 아직 다 무너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거란의 발해 잔존세력 공격 역시 이 시기에(요 태종이 중국에서 이것저것 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없었다는 것을 보면, 대광현의 내투는 100퍼센트 거란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발해 잔존세력들 간의 알력과 다툼, 정쟁으로 인해 더이상 그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렇다면 대광현을 몰아내거나 대광현과 알력을 만들어서 다툰 세력이 누구일까요. 그에 대해서는 제가 쓸 다음 글인,

발해잔존세력 글에서 쓰겠습니다.



대광현은 그 출자는 모르지만 적어도 대인선의 부왕. 혹은 대위해계 대씨왕족 왕자임은 확실합니다. 대인선 직계가 몽땅 거란에 끌러려을지라도 그 와중에 홀한성에 있지 않아 끌려가지 않을 것일수도 있고, 혹은 아예 대인선 직계가 아니라서 화를 피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대광현 역시 926년 홀한성 함락 당시 홀한성에 없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왕의 직계는 몽땅 잡혀서 거란으로 끌려가버린 지금, 대광현은 왕의 직계이던 아니던 간에 대씨 왕자임은 확실하며 정통성을 확실히 가지고 있는 인물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정통성을 제대로 가진 왕자를 이길 수 있었을까요? 세력이 큰 귀족 혹은 같은 왕족 아니면 답이 없습니다.


어쩌면 왕제가 이후로도 살아남아서 잔존세력을 데리고 발해 유민들을 이끌고 후발해/정안국을 세우는 데에 동참했을 수도 있고, 이후로도 후발해에서 무언가 역할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혹자들은 대광현의 망명 이유를 발해 왕제와 대광현의 밥그릇 싸움에서 대광현이 져서 고려로 망명한 것이다. 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역시 자료가 없기에 알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대광현 본인의 기록과 생애도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더욱 이 부분은 미궁에 빠지게 됩니다. 대광현이 발해왕제의 아들로서, 발해왕제 사후 후발해를 이어받았다가 반란 때문에 고려로 도피한 것이라는 의견도 존재합니다. 저는 이 의견을 따릅니다.


대광현이 망명해온 934년 7월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934년 12월에 대진림 외 160인이 고려로 귀부한 사건과, 불과 4년 뒤인 938년에 발해인 박승이 무려 3천여명을 이끌고 고려로 내부한 것을 보면 후발해로 합류한 발해 잔존세력들 역시 다툼과 갈등, 대립이 상당히 심했으리라 예측할 수 있습니다. 발해왕제가 잔존 발해세력을 수습했지만, 이후 여러 문제가 많이 터지고 영토이탈이 여기저기서 일어나서

정신없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전편에서 제가 써놨던 사료 그대로, 발해왕제가 잔존 발해군을 이끌고 중경으로 퇴각에 성공하여,

대인선의 뒤를 이어 후발해 정권을 세워서 934년까지 발해를 존속시켰다는 시선 역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가 933~934년경에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후계자가 대광현이라는 주장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발해 왕제는 종합해 보자면, 정말로 대인선의 동생일 확률이 상당히 높으며, 홀한성 함락 이후 움직이는 발해군들을 통솔하여 움직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인물입니다. 동시에 이후에 발해의 항쟁이 모두 막힌 이후로는 전사나 투항하지 않았다면 세력을 온존하여 발해 후계국인 후발해-정안국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나온 사료를 살펴보자면 이 발해왕제에 대한 기록은 이 이상 전무하기 때문에 추측이 더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발해군의 저항이 공식적으로 끝난 다음, 거란이 발해 땅을 모두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요동과 부여부(요 치하에서 황룡부로 바뀝니다.)와 일부 만주 지역만 차지한 다음에, 동란국마저 발해 세력들을 신경쓰느라 거란 땅으로 옮겨 버린 후에는 후발해-정안국과, 올야국이 생긴 것으로 파악되며, 학자에 따라 후발해와 올야국은 겹치는 부분도 존재하기 때문에 동일한 국체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정황상 발해 멸망 이후에 발해라는 이름을 달고 중국으로 간 사신들은 거의가 이 발해 후계 국가인 후발해로 파악이 됩니다.



거란이 미처 먹지 못한 발해고토에는 후발해와 정안국이 생겼지만, 발해가 통치하던 말갈 지역은 발해의 목줄과 통제선이 사라짐에 따라 해당 말갈들이 모조리 풀려나게 되어 발해고토 대부분은 말갈(여진) 천지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이 여진족들은 과거에 자신들을 억누르고 핍박했던 발해를 당연히 좋게 생각할 리가 없는지라, 후발해와 그 후신인-정안국과 올야국, 그리고 여진은 상당히 부딪힌 것으로 추측되며, 발해후계국 중 하나인 올야국은 결국 훗날 여진족의 손에 문을 닫게 됩니다. 그리고 발해 부흥운동 세력 중 마지막을 장식한 고영창의 대발해국 역시 마침 떠오르던 여진 완안부의 아골타와 충돌하게 되고, 이들에게 패해서 사라짐으로서 발해부흥운동, 후계국은 모조리 사라지게 되고, 발해는 여진족들을 도와 요를 공격하고, 요에게 복수 성공 하게 되지만, 이번에는 금에 의해 한화되고 중국으로 상당수가 이주하게 됨으로서 이후 중국에 빠른 속도로 동화되고 맙니다.



물론 몽골 시기와 명 초기까지 요양, 만주에 있던 예맥계 주민들은 꽤 있었다고들 합니다.




이번에는 대광현을 살펴보겠습니다.



대광현은 흔히 대인선의 부왕, 세자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서, 고려에 수만 호의 인구를 데리고 내투해 온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이미 조선시대부터 이 인간이 진짜 대인선 아들 맞는가? 왕제 아들 아냐? 라는 시선 또한 있던 인물로서, 그 내투 시기에는 925년설, 926년설, 927~934년 사이 설, 934년설이 존재합니다.



925년설은 고려사절요, 926년설은 동국통감, 934년설은 고려사, 그리고 927~934년 사이 설은 최근의 학자들 사이에서 나오는 의견이기도 합니다.



『고려사절요』 태조 8년 항목 中


-(925년)12월. 거란이 발해(渤海)를 멸망시켰다.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이었다. 당(唐)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에 고구려(高句麗) 사람인 대조영(大祚榮)이 요동(遼東)으로 달아나 점유하였다. 당 예종(睿宗)이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하니, 이로 인하여 스스로를 발해국(渤海國)이라 부르고, 부여(扶餘)·숙신(肅愼) 등 10여 나라를 병합하였다. 문자와 예악(禮樂), 관부(官府)의 제도가 있었으며, 5경(京) 15부(府) 62주(州)에 영토는 사방 5,000여 리(里)이며, 인구는 수십만이었다. 우리의 경계와 인접해 있었으며, 거란과는 대대로 원수지간이었다. 거란의 군주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발해를 공격하여, 홀한성(忽汗城)을 포위한 채 멸망시키고, 동단국(東丹國)으로 바꾸었다. 그 세자(世子) 대광현(大光顯)과 장군(將軍) 신덕(申德)·예부경(禮部卿) 대화균(大和鈞)·균로사정(均老司政) 대원균(大元鈞)·공부경(工部卿) 대복모(大福)·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 대심리(大審理)·소장(小將) 모두간(冒豆干)·검교 개국남(檢校 開國男) 박어(朴漁)·공부경(工部卿) 오흥(吳興) 등 그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전후로 도망쳐 온 자들이 수만호(戶)였다. 왕이 그들을 매우 후하게 대우하여, 대광현에게 ‘왕계(王繼)’라는 성과 이름을 내려주면서 그를 왕실의 적(籍)에 붙이고, 〈자기 조상의〉 제사를 받들도록 허락하였다. 보좌하는 신료들에게도 모두 작위(爵位)를 내려주었다.



※동국통감은 지금 이 똑같은 내용이 년도만 926년 봄으로, 홀한성이 함락된 이후로 나옵니다.





『고려사』 2권 中


-(934년)가을 7월 발해국(渤海國)의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무리 수만(數萬)을 거느리고 내투(來投)하자, 성명(姓名)을 하사하여 왕계(王繼)라 하고 종실(宗室)의 족보에 넣었다. 특별히 원보(元甫)로 임명하여 배주(白州)를 지키면서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그를 따르는 측근 인물에게는 관직을, 군사들에게는 토지와 집을 주었는데 차등이 있었다.



『아방강역고』 中


-생각건데 여기에 세자라고 한 것이 꼭 인선의 아들인 것만은 아니다. 혹은 인선의 아우가 권력으로 왕위에 올랐다가 이에 이르러 패하고는 그의 아들이 도망 온 것인지 지금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살펴보건대 이때에는 발해가 비록 망했으나 그 부락들이 모여 살았고 분명히 추장이 있어서 멀리서도 서로 화합하고 따랐기 때문에 군사를 이끌고 와서 도운 것이다.





저는 이 설들 중 우선 925년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925년은 발해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을 때라는 것이

완전히 인증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926년의 동국통감 내용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저 내용을 믿자면 홀한성이 함락되어 대인선이 끌려가자마자 그 부왕이라는 작자는 수만이나 되는 군민들을 이끌고, 바로 줄기차게 이어지는 발해의 저항에 참여도 하지 않고 달아났다는 것인데, 과연 부왕, 세자씩이나 되는 인물이 발해왕제와 백성들, 절도사들이 모두 항쟁하는데 속 편히 빠져나왔을 리가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927~933년설, 혹은 934년설을 지지합니다.



이 두 설은 우선 발해 멸망 이후 8년이나 지난 직후라서, 대광현이 우선 수만이나 되는 군민들을 데리고 오는 데에 아무 문제와 차질이 없다는 개연성이 생깁니다. 거란은 초반에 일어난 발해군들의 저항을 막은 이후 중국에 신경쓰고 바쁜 일들이 연속으로 터져서, 결국 발해 국체만 소멸시키고 고토 일부만 차지한 다음에 동란국을 거란 땅으로 옮겨버리고 발해 후계국들에 대한 신경까지 꺼 버립니다. 그렇기 문에 발해 후계국들이 그 사이에 발해 유민들을 모아서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것은 확실하며, 그 세력을 가지고 발해 후계국의 집권층끼리 내전이나 다툼을 벌여 이탈해 버렸을 수도 있으며, 다른 일이 터져서 이동을 해야 할 일이 생겼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인 대광현과 그를 받아들인 고려정부, 그리고 대광현과 함께 온 발해인들이 진짜로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완벽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추측만 가능할 뿐입니다.




중간의 927년과 929년에 발해에서 고려로 넘어오는 유민들이 줄줄이 생기던 때라서 이 시기 후발해에서 무슨 일이 났거나 정권다툼이 있었을 가능성도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그 시기가 927~933이느냐, 934이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혹자는 926 or 933년 이전에 대광현이 이미 고려로 내투했고, 고려의 대광현에 대한 처분과 봉작이 최종적으로 전부 내려진 것이 934년일 뿐이라는 주장도 하고 있습니다.


(이효형, 발해유민사 연구 中)




우선 지금까지 있는 사료로 알 수 있는 대광현에 대한 단서는,



1.대광현은 대인선의 직계가 모조리 거란으로 잡혀갈 당시에 잡혀가지 않았다. 적어도 홀한성이 함락될 당시에 홀한성에 있지 않았다. 혹은 대인선의 아들이 아닐 가능성도 꽤 존재한다.


2.1로 인하여 대광현은 장령부나 압록부에 나가 있던 발해 최후의 주력군에 속해 있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고,

군 경력이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리고 대광현의 세력들은 이 주력군들이 거란에 패하고 달아난 패잔병들과 이후 모은 발해유민들로 이루어져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3.대광현이 발해 공식 멸망 이후 8년이 지난 상황에서도 수만의 군민을 이끌고 고려로 넘어왔다는 것은, 발해 부흥세력, 발해 잔존세력들이 완전히 영세하지는 않고 어느정도 세력은 갖추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4.3으로 인해 발해 잔존세력들은 동란국의 이사 이후로도 자신들끼리 세력을 형성하여 발해고토에서 버티고 있었을 것이다.


5.대광현은 발해 잔존 세력들이 국체를 이룰 때 자신의 병력과 세력을 이끌고 참여하였지만, 이후 정쟁과 다툼으로 인해 숙청되거나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발해왕제가 이 때까지 살아있었다면 발해왕제가 여기 관여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6.대광현은 고려에게 부왕이 아닌 세자로 쓰여졌고, 부왕은 발해 시절의 명칭이다. 발해가 망한 이후에 발해 후계국의 세자였을 가능성도 존재한다.(발해왕제의 아들이었을 가능성 역시 존재.)


7.의심스럽기도 하지만 대광현은 적어도 최하 대위해계의 대씨 왕족 왕자는 확실하며, 따라서 자신의 세력과 파벌을 만들정도의 기반과 능력은 존재했다.


8.만약 대광현이 부왕이었다면 거란측에서 그를 잡으려고 시도를 하지 않을 리가 없다. 대인선을 잡아도 그의 부왕이 왕이라고 선언하면 대인선을 잡아간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란은 대광현을 찾으려는 시도를 딱히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진짜로 대광현이 부왕이었다면 숨길래야 숨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입니다.



종합해보면, 대광현은 적어도 대위해계의 대씨 왕자는 확실하며, 대인선의 직계보다는 발해왕제의 아들일 가능성이 더

높은 인물이며, 군경력이 있을 가능성, 926년 당시 군문에 있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거란과의 전투 이후에도 세력을 온존하여 발해 후계국, 잔존세력에 가담하는 데에 성공했으며, 이후 정쟁 혹은 권력다툼 때문에 고려로 달아났거나, 발해 후계국 세력이 여진의 공격을 받아서 , 혹은 그 와중에 고립되어서 고려로 어쩔 수 없이 항복했을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발해왕제와 마찬가지로 자료가 거의 없는 인물입니다. 심지어 대광현은 고려 땅에 정착하여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자료와 개인 기록이 일절 없습니다. 정확한 것은 대씨 왕족인 점, 군경력이 있다는 점, 발해멸망 이후 잔존세력에 합류하여 몇 년간 협조했지만 알 수 없는 일로 인해 고려로 탈출한 점. 이정도입니다.


만약 진짜로 발해왕제의 아들이었다면, 발해왕제가 대인선이 잡혀간 이후 스스로 왕위에 올라 부여를 공격했지만 패퇴한 이후 세력을 규합하여 후발해를 세웠다고 가정할 시, 이후 후발해가 공격을 받아 망하게 되거나 역성혁명이 일어났을 때에 대광현이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탈출하여 고려로 망명한 것이 말이 되며, 동시에 발해의 세자라고 하는 것도 앞뒤가 맞게 됩니다.


혹은 재미있는 주장으로, 발해왕제=대광현 설도 존재합니다. 대광현이 사실은 발해왕제였으며 부여를 직접 공격했다가 실패했고, 이후 발해 후계국에서 활동하다가 권력다툼에 휘말려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고려로 달아난 것이다. 라는 설로서, 이 역시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설입니다. 그 외의 여러 설도 있지만 거의가 사료로서 추정이 불가능한 상황에 개인들이 흥미 위주로 낸 설이 많아서 이 이상은 무의미해 보입니다.




이번 파트는 쓰기 좀 어려웠습니다.


추측해 볼 만한 타국 사료라도 좀 남은 발해 말, 대인선에 비해서 진짜 이 파트는 없습니다.


심지어 정안국과 후발해보다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해 멸망 이후에 발해의 동향을 설명하고

추측할 때 이 둘은 반드시 끼는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제일 아쉬운 것은 역시 대광현입니다. 고려에 내투하여 관직까지 받고 우대 받으면서 살았는데도 남긴 기록이

일절 없고 언제 죽었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도 나와 있지 않고, 심지어 그와 함께 온 수만의 발해 군민들조차도

남긴 기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정말 아쉽습니다. 그리고 대광현이 적어도 대씨 왕자라는 것이 확실한 지금,

그가 당연히 발해의 역사를 모를 리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남긴 기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매우 아쉽습니다.


만약 대광현이 집필한 발해의 역사서나 개인 저서가 존재했다면 발해의 왕자인 그가 썼기 때문에 신뢰도는 엄청났을 것입니다. 진짜로 고려에서 못 쓰게 했나. 혹은 썼는데 없어지거나 망실된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우선 발해멸망을 다룬 글은 여기에서 완전히 끝을 맺겠습니다. 사실 발해 멸망과 발해군의 항쟁까지가 마무리지만,

그 와중에 족적과 의문을 남긴 발해왕제와 대광현까지 쓰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여기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이 이후에 쓴다면 발해 후계국의 시작과 과정, 결말이라던지, 발해부흥운동에 대해 쓸 수도 있겠고,

그 이전에 하던 발해의 문화에 대해서도 쓸 수 있겠으며, 발해의 초반부 역사, 그리고 제가 현재 제일 중시하는

강왕에 대해서도 더 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마지막인 이번 편이 상당히 용두사미 격이었고 부실하기 때문에 마지막에 저도 아쉬움을 느끼며,

날림글이 되어 버린 데에 있어서는 저도 송구스럽네요.


발해 멸망전에 대해서는 또 다른 연구결과가 나오면 그것을 다시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번 글 시리즈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이 다음 글은, 제가 연구해 놓은, 후발해부터 시작하는 발해잔존세력에 대한 연구글입니다.


발해는 멸망했지만, 그 잔존세력의 역사는 더 길기 때문에 글이 더 남아있습니다.







지금까지 쓴 글들



발해멸망전 관련


발해멸망전 고찰 1편. 멸망의 전조

-https://www.fmkorea.com/6837781243


발해멸망전 고찰 2편. 925년 이전의 발해 정치상황

-https://www.fmkorea.com/6840383814


발해멸망전 고찰 3편. 공백의 5년(913~918)

-https://www.fmkorea.com/6841829328


발해멸망전 고찰 4편. 918~924년까지 발해는 과연 무엇을 했을까?(상편)

-https://www.fmkorea.com/6844051571


발해멸망전 고찰 4편 (하편)

-https://www.fmkorea.com/6844149065


발해멸망전 고찰 5편

-https://www.fmkorea.com/6846820595


발해멸망전 고찰 6편 - 925년 반란설 상

-https://www.fmkorea.com/6849396028


발해멸망정 고찰 6편 - 925년 반란설 하

-https://www.fmkorea.com/6850618504


발해멸망전 고찰 7편 - 마지막 순간(상)

-https://www.fmkorea.com/6862001225


발해 멸망의 의문점 고찰 상

-https://www.fmkorea.com/6865875091


발해멸망전 고찰 7편 - 마지막 순간(중)

https://www.fmkorea.com/6866011369


발해멸망전 고찰 7편 - (하)

-https://www.fmkorea.com/6867818441


발해 멸망전 고찰 8편 - 상

-https://www.fmkorea.com/6885806282




발해멸망전을 제외한 다른 글들



5경 15부 62주에 대한 오류 가능성 검토

-https://www.fmkorea.com/6797762364


발해 국호는 발해가 맞습니다

-https://www.fmkorea.com/6801049872


무왕과 대문예의 형제싸움으로 인한 나비효과

-https://www.fmkorea.com/6804185836


발해사 최대의 미스터리, 882년 정변설

-https://www.fmkorea.com/6807940225


'886년 사건'의 진실에 대하여

-https://www.fmkorea.com/6809313438


'쟁장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https://www.fmkorea.com/6810052709


'등재서열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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