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발해, 그 이후 - 970~981년 사이의 정안국을 둘러싼 미스터리[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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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기먹는스님 댓글 0건 조회 77회 작성일 24-05-04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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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mkorea.com/6986691160





전편인 정안국과 백두산 폭발입니다.


바쁘신 분들은 맨 아래의 요약을 보세요.






이번 글은 정안국의 상황을 사료를 보고 판단하여 제가 제 사견을 섞어 풀고 추론한 것으로서,

역사에서 정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 주장과 연구결과일 뿐임을 밝힙니다.




당분간 사료가 없던 정안국이 다시 역사 위로 떠오르는 년도는 970년입니다.

970년에 송나라에 정안국의 왕이었던 열만화가 보낸 표가 도착했다는 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문헌통고』 327권,사예고 항목 中


-송나라 개보 3년(970), 그 국왕 열만화가 여진이 사신을 보내 입조하는 편에 표를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송사』 491권, 외국전 정안국 中


-개보 3년(970)에 그 나라의 왕 열만화가 방물을 바치러 가는 여진의 사신을 통해 표문과 바칠 방물을 부쳤다.


-단공 2년(989)에 정안국의 왕자가 여진의 사신에게 부탁하여 말, 수리깃털, 우는 화살을 보내왔다.


-순화 2년(991)에 그 왕자 태원이 여진의 사신에 부탁하여 표를올렸다. 그 이후 다시는 이르지 않았다.




이 사료는 짤막한 단편적인 사료이지만, 한편으로는 정안국이 지난 편에 이어 열씨가 세운 정권이라는 것을

공고하게 설명해 주는 단락이기도 합니다. 930년대 중반에 대씨를 몰아내었다는 정황이 있는 만큼, 그 때 나온 열주도와 성이 같은 열만화가 기록에 등장한다는 데에서 열씨가 대씨를 몰아내고 정안국을 세운 것이 거의 확실해지는 부분이 보입니다. 그리고 이 기록은 이전에 마지막으로 정안국 세력이 등장하는 936년과 938년에서 많은 세월이 흘렀으며, 중간에 정안국이 백두산 분출로 인한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도 꽤 크며, 중간에 요나라에게 공격을 받아 피해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도(전편 참조) 정안국이 아직 멀쩡히 살아 세력을 이루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주목할 것은, 정안국이 사신을 보내서 송에 서신을 전할 때, 혼자가 아니라

여진의 사신을 통해서 표문과 방물을 바쳤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는 과거에 말갈과 같이 사신을 보낸 것과는 다른

의미로, 분명하게 여진의 사신을 통해, 입조하는 길에 보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발해-후발해 시절에는 자력으로 사신을 보냈지만, 이번에는 여진을 통해 '업혀서' 사신을 보낸 것입니다.




이는 현재 풀이하고 있는 해석으로는, 정안국이 자력으로 사신을 보내지 못해서 여진에게 부탁하여 함께 보낸 것이다. 혹은 정안국이 여진을 어느정도 부리고 있었기 때문에 여진이 사신을 보내는 김에 함께 보낸 것이다. 둘 중 하나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전 편에서 언급했다시피, 요나라는 발해 잔존세력인 정안국과 여진을 딱히 구별하지 않고 역사서에 서술했기 때문에, 과연 여진이 이 시기에 정안국에게 어느정도 복속하고 있었는지, 혹은 복속은 아니지만 정안국과 어느 정도 제휴 관계나 협조, 동맹관계를 맺어서 그런지는 현재로서는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981년에도, 989년에도, 991년에도 같은 송사 491권 정안국 항목 중에 비슷한 내용이 또 나옵니다.


저는 이 두가지의 사료를 보았을 때, 970년에는 정안국이 여진의 사신이 가는 길에 함께 사신을 보낸 것이 조금 더 맞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안국의 역사에서 정안국이 결정타를 맞고 약해진 것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979년과 986년의 결정타가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아직 정안국이 딱히 망해간다. 라는 느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981년에는 확실하게 부탁하여 표문을 부쳐 올렸다는 말이 실려 있고, 앞에서 사신을 함께 보낼 때에 같이 보냈던 방물들, 조공품을 같이 바쳤다는 말이 일절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는 981년에는 정안국이 거란의 침공을 받아서 나라가 어려워진 와중이라 중국에 가는 여진 사신에게 부탁을 하여 자신들의 표문(아마도 함께 요나라를 치자고 요청하는 표문)을 함께 보내 주십사 요청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를 통해 적어도 정안국과 여진은 최하 친선 관계 혹은 우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됩니다.




『동국통감』 16권 中


-12월에 흥료국 태사 대연정이 동북여진을 인솔하여 거란과 서로 공격하면서 사신을 보내와 구원을 청했다.


『고려사』 5권에도 동일한 내용이 존재합니다.




이는 훗날 대연림이 흥료국을 세워서 요나라에 대항할 때에 동북여진과 함께 거란에 대항하였다는 항목이 고려사와 동국통감에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1000년대 중반까지 발해 잔존세력과 여진 세력의 협조는 꾸준히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정안국 이후의 발해잔존세력에 대해서 정확한 명칭이나 파악은 다음 글에서 하겠습니다.)




그럼 잠시 앞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970년에는 비교적 별 일 없던 정안국이 981년에는 대체 뭔 일이 났길래,

자력으로 사신도 보내지 못하고 여진한테 부탁해서 겨우겨우, 그것도 최소한의 체면도 없이 공물도 없이 보낼 정도로 박살이 났다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보통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 공물을 보내면서 서신을 함께 보내는 경우를 취합니다. 신라도 그리 했으며, 다른 중국 근처의 이민족, 그리고 구 발해왕조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후발해와 불과 10년 전의 정안국 역시 그리했습니다. 저는 이 이유를 오현명의 서신에서 찾고 있습니다.





『송사』 491권 외국전 정안국 항목 中


-정안국왕 신 오현명이 아룁니다. 엎드려 성스러운 군주가 천지를 융합하는 은혜와 오랑캐를 위로하는 풍속을 만나

신 현명은 실로 기쁘고 실로 즐거워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립니다.

신은 본래 고구려 옛 터의 발해의 유민으로서 한 구석에 웅거하여 세월을 보내며 홍균지덕을 우러러 받사옵고 무외지택을 입어 감화되어 각각 자기의 처소를 얻고 사물의 제 본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거란이 자신의 강포함을 믿고서 우리 경내에 들어와 노략질하여 성채를 공략하고 백성을 잡아갔습니다.


신의 조고(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절의를 지켜 항복하지 않고 무리들과 피난하여 살아남은 사람만 모여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또 부여부는 지난날 거란을 배반하고 본국으로 귀부했으니 장차 (거란에게)다가올 재난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천조의 비밀계획을 받고 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을 도와 반드시 원수를 갚으려 하는 것이 마땅하므로 감히 명을 어기지 못하겠습니다. 신 오현명은 진실로 간곡히 원합니다.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립니다.


그 끝에 "원흥 6년 10월 모일에 정안국왕 신 현명이 성황제 앞에 올리는 표" 라고 썼다.





읽어만 봐도, 현재 오현명과 정안국이 처한 상황이 대충 눈치가 갑니다. 문체에서부터 상당히 다급함이 느껴지고 있으며, 진짜로 체면이고 뭐고 다 버리고 칭신에 굽신까지 하면서 긴급하게 SOS를 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 글 전체에서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불과 11년만에 정안국이 이렇게 긴급해진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 보겠습니다.



우선 저는 오현명이 보낸 편지로 보아 추측하여 거란에서 975년에 일어난 연파의 난이 그 원인이라 생각합니다.

잠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언급하자면, 사서를 보면 존재하는 979년에 요에서 송으로 항복해 온 발해인 무리의 수장인 '대난하'는 요에서 중국 루트를 타고 바로 송으로 와서 항복했기 때문에, 요나라에 끌려가 그 중심지에 살고 있던 발해왕족의 후손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정안국의 사태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우선 975년에 일어난 연파의 난에 대한 사료를 보겠습니다.




『요사』 8권 경종 항목 中


-(975년)가을 7월에 황룡부(구 부여부) 위장 연파가 도감 장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창사 야율갈리필을 보내 토벌하게 하였다. 9월에 치하에서 연파를 패배시키고 야율갈리필의 아우인 야율안박을 보내 추격토록 하였다. 연파가 올야성으로 달아나 지키니 야율안박이 회군하였고, 연파는 그 나머지 무리 1천여 호로 통주(길림 농안현 부근)에 성을 쌓았다.





우선 975년에 일어난 연파의 난은 요나라 입장에서 상당히 센세이션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반란자가 나오면,

반드시 추격하여 없애고 그 시신을 찢어서 공개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던 요나라였는데, 이번에는 반란자를 잡기는

커녕, 반란자인 연파는 패배는 하였지만 자신의 세력을 멀쩡히 유지하면서 올야성까지 달아났으며, 황제가 직접 보낸 야율갈리필과 야율안박은 연파를 잡지도 못하고 철수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후 연파는 20년이 지난 990년대 중반까지 요사에 등장하면서 요나라의 뒤통수를 장장 긁어대고, 결국 995년에 요나라를 또 물어뜯는 것을 보면, 이 975년의 연파 토벌전으로 인해 요나라가 연파에게 입힌 피해는 생각외로 크지 않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개연성이 약간 이상한 부분이 존재합니다. 패배해서 올야성으로 달아난 연파를, 더이상 공격하지 않고 회군한 것입니다. 요군은 승군이었고, 연파군은 패군이었고 성에 겨우 들어가 방비하고 있었는데, 왜 요군이 올야성을 공격 않고 회군했냐는 것이 쟁점이 됩니다. 저는 이 이유를 바로 위의 오현명의 언급과 연결지어 생각합니다.



오현명은 앞에서 부여부가 본국으로 귀부하였으며, 이것이 거란에게 재앙이 될 것이라고 송태종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여부'는 진짜 요나라의 땅인 황룡부(구 부여부)가 아니라, 부여부에 연고를 가지고 있었으며, 부여부에서 벼슬을 하다가 그 곳의 세력과 병력을 끌고 달아난 연파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황룡부(구 부여부)는 요의 중심지역이자 중요지역 중 하나이며, 이후로도 요사에 요의 지역으로 나오기 때문에, 황룡부에 연고와 세력이 있던 연파가 자신이 빼 갈 수 있는 것을 몽땅 빼서 달아났다고 생각하는 쪽이 좀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위에서 설명한 오현명의 말로 추정해 보자면, 요군이 올야성을 공격하지 않고 그냥 철수한 것은, 정안국의 병력들이(요나라는 의미심장하게도, 자신들에 소속되지 않은 발해세력을 표현할 때 발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발해 잔존세력의 군은 이상하게 발해군이라고 표현해 놓습니다.)연파의 SOS와 합류 요청을 받아들여서, 연파를 도우러 왔으며, 이에 야율안박은 협공당해서 망하지 않도록 빠르게 소식을 입수하자마자 철군했다고 하면 이야기가 들어맞습니다.




또한, 오현명은 송태종에게 보내는 편지에, 송태종이 세력도 약하고, 요와 정면승부 하면 승산도 없는 자신들이 부탁해봐야 반응이 미적지근 할 것을 고려하였는지,(송태종은 이 편지가 쓰여진 981년에서 불과 몇 년 전인 979년에 북한을 멸망시킨 이후 거란과 크게 한판 붙어 제대로 물을 먹고 자존심을 구기고 칼을 갈고 있던 상태였습니다.)'부여부' 출신의 연파가 자신들에게 세력을 이끌고 달아나 SOS를 치고 의탁한 이 사건을(송태종이 와서 직접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도 없을테니),



MSG를 좀 많이 치고 과장을 하여 부여부 출신의 연파가 세력을 이끌고 요나라를 한방 쥐어박고 의탁해 온것을 날조하여, 황룡부 전체가 정안국으로 붙었다는 식으로 과대포장을 하여 광고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송태종이 생각을 다시 하고, 승산이 있겠다. 라고 생각하게 과장을 해서 유도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실제로 송태종은 저 말을 믿고 어 그래? 요나라가 지금 그런 상황이라 이거지? 그럼 해볼만 하겠는데? 한판 붙어볼까? 하고 정안국에게 자신들을 도우라고 반응을 합니다.)




하지만 연파를 도운 것 까지는 좋았지만, 요나라가 자신들의 반역자를 도운 정안국을 가만히 놔 둘 리가 없습니다.


안 그래도 발해의 잔존한 파편이자 후방에서 항상 거슬리고 성가신 존재로 있는 이들을(정안국+여진세력) 요나라가 딱히 건드리지 않고 있던 이유는, 중국의 강대한 송나라가 주적이기도 하며, 요의 최종목표가 연운 16주와 중원이었기 때문이며, 이들을 내버려 두어도 요나라의 안위에 큰 이상이 없기 때문이었지, 절대 요나라가 힘이 없어서 건드리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요나라는 그런데도 당장 정안국과 연파를 침공하지 못하였는데, 975년에 일어난 연파의 난 이후 그 바로 다음 해인 976년에 송나라의 황제가 태조에서 태종으로 바뀌고, 북한이 송에게 멸망당하고, 요와 송이 979년 말까지 빅스케일로 제대로 붙었기 때문에 도저히 동남쪽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976년에는 간뎅이가 진짜로 부었는지, 연파의 합류로 자신감을 얻었는지, 정황상 정안국(+그 휘하 여진세력)이 요나라를 선제침공해서 노략질하기까지 합니다.





『요사』 8권, 경종 항목 中


-(976년) 8월(중략) 이 달에 여진이 귀덕주(현재 랴오닝성 톄링시)의 동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9월 기사일에 회릉에 참배하였다. 신미일에 동경통군사 찰린과 상온 확이 아뢰길, 여진이 귀주(랴오닝성 개평현)

5채를 습격하여 노략질하였다고 하였다.



요나라는 송나라와 한참 전쟁중이었기 때문에, 이 노략과 공격에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이 976년의 여진을 왜 여진이 아니라 정안국으로 생각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면, 바로 그 다음해인 977년 봄 정월에 여진에서 요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 또 여진이 사신을 보내 조공합니다. 978년 4월에도 여진의 조공은 이어집니다.





위의 사료와 동일


-보령 9년 봄 정월 병인일, 여진이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겨울 10월)임신일에 여진에서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978년) 여름 4월 정묘일, 서쪽으로 행차하였다. 기사일에 여진에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제가 아는 한, 정안국은 나라가 존속되고 있었을 때, 원수나 다름없는 요나라에 조공을 한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연파와 이미 손을 잡고 연파를 받아들인 것이 확정사실화 되어 요의 어그로를 확실하게 끈 이 상황에 요나라에 뜬금없이 조공을 할 이유도 없거니와, 이 여진이 정안국이라 친다면 979년 9월에 요나라가 정안국을 친 정황이 보이기 때문에 조공을 받아놓고 정안국을 친다는 말이 안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전편에 언급했듯이 요사에 나오는 여진은 진짜 여진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정안국을 가리킬 때도 여진이라는 말을 쓰기 때문에 여진이라는 단어의 주체를 살펴보려면 앞뒤 상황을 다 살펴보고 판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 977~978년 사이에 거란에 조공을 보낸 여진은 정안국이 아니라 오리지널 여진이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의 내용과 연결지으면, 요나라를 공격하고 약탈한 것은 자신들과 연합한 연파의 영향이라고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요나라와 체급 문제와 군사력 문제 때문에 맞서기 힘들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안국은 연파를 받아들이고 요나라를 공격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이 시점에서 주목하는 것은 두가지입니다. 그 첫번째는, 970년에 정안국의 왕은 열만화였는데, 981년 시점의 정안국의 왕은 오현명인 것이다. 두번째는 981년에 정안국왕 오현명이 자신들의 연호를 사용하여 원흥 6년이라고 칭한 점.


공교롭게도 연파가 정안국으로 달아나 합류하여 활동을 시작하는 975~976년 사이 시기는 위의 981년이 원흥 6년이란 것을 염두하고 계산해 보면, 원흥 연호의 시작시기와 꽤 일치합니다. 저는 이 975~976년 사이에 오씨가 열씨에게 정안국의 왕위를 빼앗았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리고 연파는 훗날에도 정안국의 왕성이었던 오씨와 함께 행동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것을 보면 연파와 정안국의 오씨 세력은 동맹세력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요사』 13권 성종 항목 中


-(995년)가을 7월 초하루 을사일에 여진에서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정사일에 올야 오소도와 발해인 연파 등이 철려를 침공하니, 해왕 화삭노 등을 보내 토벌하도록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열씨가 왕으로 앉아 있었던 정안국에 연파가 오면서, 마침 왕위를 노리고 있던 오씨가 연파에게 접근하여 동맹을 맺고, 연파는 정안국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도왔다. 그렇게 되어 오씨가 정안국의 왕이 되었다. 라고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씨에게 연파는 정안국의 왕위를 차지하는 것을 도와준 고마운 동료이자 동맹이기 때문에 이후로도 행동을 같이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위에 있는 오현명의 서신 중에 이러한 항목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거란이 자신의 강포함을 믿고서 우리 경내에 들어와 노략질하여 성채를 공략하고 백성을 잡아갔습니다.


신의 조고(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절의를 지켜 항복하지 않고 무리들과 피난하여 살아남은 사람만 모여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저는 이 사료로 보아서,975~976년경에 열씨에게서 왕위를 빼앗은 사람은 오현명의 할아버지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료에서 '근년'에 거란이 정안국을 공격하고 백성을 잡아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근년'의 정체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이견이 존재하는데, 926년에 발해가 멸망한 것을 이야기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근년의 정체를 979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사료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요사』 9권 경종 항목 中


-(979년)9월 기묘일에 연왕 한광사를 도통으로, 남부재상 야율사를 감군으로 삼은 후, 척은 야율휴가, 남원대왕 야율사진, 권해왕 야율말지 등에게는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남쪽을 정벌하라 하였다.(중략) 11월 무인일에 야율휴가와 공을 세운 장교들에게 상으로 연회를 베풀었다.




『고려사』 2권 中


-경종 4년(979) 이 해에 발해인 수만명이 와서 투항했다.



우선 979년의 요사 기록은 정안국을 침공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위에 언급된 연왕 한광사는 10월에 송군과 싸워 크게 패합니다. 하지만 경종의 자비로 죄만 일깨워준 후 사면시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불과 며칠 후, 11월에 갑자기 뒤에 언급되어 있는 야율휴가와 그 휘하 장교들은 상을 받고 연회를 베풀어 줍니다. 연왕 한광사와 야율휴가가 함께 출전했다면, 한광사가 패하여 사면받은 상황에 야율휴가가 한광사와 함께 송을 치는 데 합류했다면 당연히 함께 패했을 것이므로, 그와 같이 떠난 장교들에게 연회를 베풀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위의 문장은, 한광사와 남부재상 야율사는 송나라를 상대했고, 야율휴가, 야율사진, 야율말지는 정안국을 쳤다고 보는 것이 고려사와 위에 나온 오현명의 서신과 맞아 떨어지며, 연파의 난을 도운 앙갚음과 그 이후 요를 공격한 데에 대한 복수와 맞아 보입니다. 결국 요나라가 979년에 정안국을 쳤기 때문에 요 입장에서는 복수를 한 것이고, 정안국의 주민들이 고려까지 달아난 것이며, 정안국이 오현명의 서신대로 피해를 입은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원흥 6년'이라는 표현이 있고, 981년 당시 정안국왕은 오현명입니다. 그런데 오현명의 할아버지가 있었다는 것이 인증이 되었는데, 이 할아버지는 뭐고 원흥 6년은 뭐냐. 라는 궁금증도 있을 법 합니다. 저는 그래서 이 구간을, 오현명의 할아버지가 975-976년 연간 사이에 열씨를 연파와 함께 내몰고 왕위에 앉아서 원흥 연호를 썼으며, 979년에 대대적으로 쳐들어온 요군을 어찌어찌 큰 피해를 입어가며 겨우 막아내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정안국 자체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오현명의 할아버지는 981년에 사망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보통 연호는 그 앞에 연호를 썼던 왕을 공경하거나, 혹은 한 년도별로 연호교체를 끊어서 생활에 지장이나 헷갈림이 없도록 하는 의미에서 한 년도에 한 연호를 주로 쓰는 방식을 택하기도 합니다.(다만, 무조건 다 이것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979년에 오현명의 할아버지가 거란을 막아낸 후 981년 연간에 사망하였으며, 오현명은 여진의 편에 서신을 보냈을 당시에, 즉위 원년이었거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이제 갓 즉위한 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연호를 아직 고치지 않았던 것이며, 그래서 원흥 6년 연호를 981년 연간에 쓰고 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오현명이 송태종에게 서신을 보낸 이유는, 요나라가 정안국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던 이유는 바로

송나라의 존재, 그리고 송나라와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송과 요의 전쟁이 끝나거나, 두 나라가 화친을 한다면 그 다음

요의 공격대상은 이미 요의 어그로를 몇번이나 끌었던 정안국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기 때문에, 어떻게든 송을 더

움직여서 송과 요가 전쟁을 계속 하게 만들던지, 혹은 송이 대대적으로 요를 쳐서 요의 힘을 빼서 정안국을 미처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진짜 잘 되어서 송이 요를 완전히 박살내면 콩고물을 얻어갈 심산도 포함.)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송태종이 승산을 느끼게 하여 요나라를 계속 치게 하기 위해 연파의 합류를 '부여부의 귀부'로 완전히

뻥튀기해서 이야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송태종은 립서비스만 했으며, 실상은 송나라 역시 요나라와의 전쟁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태도는 보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후, 우리들 교과서에 정안국의 멸망으로 표기되어 있는 986년이 다가오게 됩니다.





이 글을 종합해 보면,




1.975년 연파가 요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난리를 친 후 정안국으로 달아남.


2.정안국은 연파 세력을 받아들이고 도왔으며, 정안국의 오씨 세력은 연파와 손을 잡고

정안국의 왕위를 찬탈한다.


3.그리고 연파와 연합한 정안국은 976년에 두번이나 요나라를 공격하고, 이는 요나라의 어그로를 끌게 된다.


4.결국 979년에 요나라는 정안국을 침공했으며, 정안국은 이를 어찌어찌 막아는 냈으나,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요나라의 위협은 아직 여전했다.


5.981년에 할아버지 사후 왕위에 오른 오현명은 어떻게든 송과 요의 전쟁을 계속되게 만들려고(혹은 송이 진짜 마음먹고 나라 역량을 기울여서 요를 제대로 치게 만드려고)자신의 처지를 뻥튀기해가면서까지 송태종을 부채질했다.




이 정도가 되겠습니다.




궁금점이나 이야기 나눌 점은 댓글로 받겠습니다.




다음 편은 981년 이후의 정안국에 대한 글이 되겠습니다.





발해멸망전 관련


발해멸망전 고찰 1편. 멸망의 전조

-https://www.fmkorea.com/6837781243


발해멸망전 고찰 2편. 925년 이전의 발해 정치상황

-https://www.fmkorea.com/6840383814


발해멸망전 고찰 3편. 공백의 5년(913~918)

-https://www.fmkorea.com/6841829328


발해멸망전 고찰 4편. 918~924년까지 발해는 과연 무엇을 했을까?(상편)

-https://www.fmkorea.com/6844051571


발해멸망전 고찰 4편 (하편)

-https://www.fmkorea.com/6844149065


발해멸망전 고찰 5편

-https://www.fmkorea.com/6846820595


발해멸망전 고찰 6편 - 925년 반란설 상

-https://www.fmkorea.com/6849396028


발해멸망정 고찰 6편 - 925년 반란설 하

-https://www.fmkorea.com/6850618504


발해멸망전 고찰 7편 - 마지막 순간(상)

-https://www.fmkorea.com/6862001225


발해멸망전 고찰 7편 - 마지막 순간(중)

https://www.fmkorea.com/6866011369


발해멸망전 고찰 7편 - (하)

-https://www.fmkorea.com/6867818441


발해 멸망전 고찰 8편 -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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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멸망전 고찰 8편 -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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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멸망 이후 대씨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이유 -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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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멸망 이후 대씨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이유 -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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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멸망의 의문점 고찰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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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멸망의 의문점 고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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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그 이후(발해잔존세력사)



시작 및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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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발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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